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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게 닫혀 있던 열매가 가장 뜨거운 볕을 이기지 못하고 제 몸을 찢는다.그 틈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핏빛보다 짙은 고백이다.너는 끝내 나를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 김선우, 《단단한 고요》의 석류 모티브 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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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0zbrsA82oQ?si=wRD5IY2M8WVK0P3U
1장. 첫 만남, 가장 가까운 침범
텁텁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찌든 방주경찰서 강력2팀 사무실.
블라인드 틈새로 한낮의 뜨겁고 쨍한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더미들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정적을 깨고 철제 문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열린 것은 정확히 정오를 알리는 시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여자는 이 낡고 음침한 변두리 서(署)와 지독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흐트러짐 없는 슬랙스 슈트, 그리고 무선 이어폰을 낀 채 손에 태블릿을 쥔 서늘한 실루엣. 본청 정보분석계의 에이스, 권사하 경위였다.
점심시간을 맞아 하나둘 자리를 비우는 팀원들 사이로 불쑥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에 다들 눈을 껌벅였지만, 정작 한지욱만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점심 생각도 잊은 채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방금 발생한 살인사건의 초동 보고서가 화면 가득 떠 있었고, 마우스 휠을 신경질적으로 굴리며 사진 자료를 넘기는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멈췄다 움직이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지욱의 머리 위로 붉은 선 수백 가닥이 이지러진 실타래처럼 엉킨 채 정오의 햇빛을 받아 일제히 출렁였다. 물론 사하의 눈에는 그 붉은 줄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하의 눈에 비치는 지욱은 그저 모니터 앞에서 나른하게 풀어진 채, 눈매만 지독하게 매서운 선배 형사일 뿐이었다.
지욱은 턱을 괸 채, 날카롭게 벼려진 집요한 시선으로 사하의 구두 끝부터 단추가 끝까지 잠긴 셔츠 깃을 지나 무표정한 얼굴까지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그리고 시선이 사하의 정수리 위 허공에 닿았을 때, 지욱의 눈매가 찰나의 순간 더 잘게 찢어졌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엘리트 후배의 머리 위로, 단 하나의 가느다란 붉은 선이 아슬아슬하게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난 팀장이 새로 온 동료를 맞이하러 성큼 다가왔다. 사하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이야, 우리 방주서 강력2팀 완전히 출세했네."
팀장의 환대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에 앉은 채 시선조차 주지 않던 지욱이 낮게 중얼거렸다.
"뭐야? 그렇게 인원 보충 해달라고 할 때는 안 해주더니, 이제 와서? 그것도 현장직 경험 하나도 없는 애를?"
새 얼굴에 대한 반가움보다 불만이 짙게 밴 목소리였다. 사하는 그런 지욱을 힐끗 보고는, 유일하게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팀장에게 담담히 말했다.
"저 자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공무원증을 책상에 탁 내려놓으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지욱을 향해 받아쳤다.
"한지욱 형사님께서 현장 경험이 그리도 탁월하신가봅니다. 형사님께 한 수 배워야겠네요."
지욱은 기가 찬다는 듯 낮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고는 제 책상과 바짝 붙은, 오랫동안 비어 있어 서류 뭉치만 굴러다니던 옆자리 책상을 턱끝으로 툭 가리켰다.
"잘 됐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자리는 내 옆자리니까. 거기서 실시간으로 감상해 봐."
지욱이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훅 숙이며 사하에게 다가왔다. 짙은 눈동자가 사하를 잡아삼킬 듯 올곧게 박혀들었다. 사하는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도 단 한 걸음 물러서지 않은 채, 특유의 나른하고 반항적인 눈빛으로 선배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것이 정오의 쨍한 햇살 아래, 방주경찰서 강력2팀 안에서 나란히 맞닿은 두 경위의 지독한 첫 만남의 시작이었다.